전문가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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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제안보를 위한 한-중남미 협력
LG경영연구원 김형주 수석연구위원
경제안보 시대의 개막

‘경제안보’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화두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낮은 가격’과 ‘높은 효율성’이 최고의 경쟁력으로 꼽히던 시대, 이념이나 체제보다 경제적 손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던 시대가 저물어간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국경을 넘나들던 기업인들도 새로운 시장을 찾기 전에 ‘안보’라는 필터를 먼저 꺼내 들기 시작했다. 선진 기술과 풍부한 자본에 아낌없이 문을 열어주던 각국 정부도 과거와 다른 잣대로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투자 허용 여부를 고민한다.

냉전 종식 이후 30여 년에 걸쳐 쌓아온 ‘경제가 안보를 책임질 수 있다’는 믿음. 즉, 상호의존(interdependency)이 깊어지면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충돌이나 갈등을 최대한 피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고, 오히려 자국 안보를 위해 경제를 인질로 삼거나 자원을 무기로 활용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확산과 전지구적 봉쇄(lock-down) 경험을 통해 효율성에만 초점을 맞춘 글로벌 공급망 편중이 얼마나 큰 위협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깨달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기술 패권 경쟁 등을 통해 경제적 상호의존이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똑똑히 확인한 탓이 크다. 결국, 단일 공급망의 위험성, 그리고 식량 및 원자재의 무기화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면서 ‘경제안보’와 이를 위한 ‘공급망 안정화’가 각국 정부의 최우선 정책 과제로 부상하였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심화와 그 영향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 그리고 이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안타깝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줄곧 중국을 불편하게 느끼기는커녕 중국경제의 성장이 자국 기업에게 투자 기회를 제공하고 국민들의 소비 확대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최적의 파트너로 꼽아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에는 중국의 적극적인 경기 부양 정책 덕분에 선진국들이 위기를 빠르게 극복했다는 평가도 많았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은 ‘위대한 중국’에 대한 꿈(=中國夢)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고, 이는 곧 동아시아 지역 패권에 대한 욕심(=신형대국관계)으로 이어지며 태평양 건너 미국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양국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촉매로 탈바꿈했다.

특히,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당선된 트럼프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미·중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중국은 THAAD 사태를 계기로 대미 전략 방향을 새롭게 설정했고, 새로 출범한 바이든 정부 역시 미·중 간 무역 및 투자를 ‘안보 리스크가 내포된 활동’으로 판단하는 조치들을 계속 늘려가는 추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의 대중 견제가 모든 산업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미국의 안보와 지속 가능한 성장에 필수적인 분야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컴퓨팅(ex. 반도체), 바이오(ex. 백신), 클린테크(ex. 전기차 배터리) 등의 첨단 산업을 중국과의 기술 격차 확대를 위해 꼭 필요한 ‘전력승수(Force Multiplier)’라고 칭하면서 해당 기술 분야에서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안보의 필수 요소라고 강조한다. 이를 확보하기 위해 관련 기술에 대한 대중 무역/투자 규제를 도입한 데 이어, 제조 역량 및 국내공급망(DVC, Domestic Value Chain)을 확충하기 위한 각종 지원 제도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공급망 안정성을 위해 함께 노력할 ‘믿을만한 국가’들과의 협력체 구성 노력도 병행 중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전략적 선택은 각국 기업과 정부에게 두 가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 가격 경쟁보다 공급망 안정성이 더 중요해졌고, 두 번째로 자국의 부존자원과 산업 발전 단계에 따라 외교적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효율성보다 안정성 중시 요구 증가

경제적으로 공급망 안정성이 중요해진 이유는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우 전쟁, 기상 이변 등을 겪으며 과거에는 별로 경험하지 않았던 부품의 공급 중단이나 물류 차질에 따른 큰 피해를 반복적으로 입었기 때문이다. 항구/공장 봉쇄 및 폐쇄,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 요소수 사태 등 일종의 병목 현상으로 공급망 전체가 멈춰서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공급망 리스크를 경영 환경의 주요 변수로 고려하게 된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경영 리스크는 ‘수요’ 측면과 ‘공급’ 측면에서 모두 발생하지만, 그동안은 대체로 공급(생산)보다 수요(시장) 관련 리스크 관리에 주력해왔다. 원자재 가격 변동이나 정치/사회적 급변 사태 등 생산과 관련된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계 경제가 ‘개방과 경쟁’을 공동의 목표로 삼아온 지난 30여 년간 이와 관련된 변동성은 빠르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기업들은 더 나은 공급 여건을 찾아 여러 국가들을 탐색하며 가장 효율적인 생산기지와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했고, 그 덕분에 상당히 안정적인 생산비 여건을 바탕으로 상품 판매, 재고 관리, 대금 회수 등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아무리 주문을 많이 받아도 상품을 기한 내에 공급하지 못해 페널티를 물었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다. 한 국가가 나쁜 의도를 품고 자국 상품 수출을 금지하거나 물류를 막는 ‘공급망의 무기화’도 가능해졌다. 공급망 의존도가 높을수록 이 무기의 파괴력이 올라가는 만큼 이제 공급망 관리와 안정화는 기업은 물론 각국 정부에게도 안보 관점에서 중요한 과제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효율성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공급망을 다변화하거나 자국 내에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면서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다음으로, 외교적 선택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어느 나라도 공급망 관련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산업을 자국 내에서 생산할 수는 없다.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각국마다 비교우위와 부존자원이 다른 상황에서 섣부른 국내 생산 결정은 시장을 왜곡해 인건비 상승, 인플레이션 등 다양한 문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급망 리스크에 대비하면서 시장의 충격을 최소화할 해법이 필요한데, 현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대안은 신뢰할만한 파트너 국가들을 잘 선별해 공급망 관련 긴밀한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경제안보 관점에서 글로벌가치사슬 변화 방향을 전망하고 대응하는 정부의 안목과 외교적 역량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원 부국과 제조강국, 거대 시장 보유국들 간 역학관계와 협상력 변화를 정확히 예측해 최적의 협상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공급망 재편에 따른 한·중남미 협력의 기회와 한계

이런 맥락, 즉 공급망 안정성과 외교적 셈법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중남미는 미국과의 지리적 근접성, 외교 관계, 부존자원 현황 등 여러 측면에서 한국 정부와 기업들에게 신뢰할만한 공급망 협력 파트너 및 대체 생산지 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생산 분업이 중국, 동남아 등 아시아 지역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만큼 ‘리스크 분산’이란 취지에도 잘 부합한다.

물론 모든 업종에서 한국과 중남미 간 협력 확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기업들이 생산 분업의 전제 조건으로 자주 꼽는 제조업 경쟁력이나 인적자원 면에서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만들만한 업종이 제한적이고, 치안이나 물류 상황에 대한 우려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공급망 리스크가 부각되는 친환경·탈탄소 분야로 그 대상을 좁혀서 생각하면 평가가 달라진다. 전기차와 배터리 및 관련 원부자재와 핵심광물 등에 대한 생태계는 중남미가 그 어느 지역보다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중남미는 중요한 수요 시장인 미국, EU와 여러모로 가까우면서도 주요 자산인 핵심광물의 고부가가치화에 관심이 많다. 멕시코의 경우, 미국이 인플레이션법안(IRA)을 통해 제공하는 각종 혜택의 수혜 조건을 충족할 최적의 생산기지다. 오랜 기간 누적되어온 자동차 및 전자산업 제조 역량도 뛰어난 편이다. IRA 조건이 공개된 작년 가을 이후 멕시코로 몰려드는 다국적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주재원들의 주거 비용이 급등했다는 소식도 이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리튬 삼각지대(Lithium Triangle)를 둘러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등 3개국과의 협력을 타진하는 정부와 기업들이 급증한 것도 비슷한 예다.

또한, 미국, EU 등 에너지 소비 규모가 큰 국가일수록 에너지 관련 공급망의 안정성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미 중남미 광물자원 및 관련 제조업 분야에 폭넓게 진출해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면, 마치 유럽이 너무 높은 러시아 화석연료 의존도 때문에 에너지 안보 위기에 처했던 것과 비슷한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중남미 내 차세대에너지 관련 가치사슬에서 중국 비중을 낮추고 신뢰할만한 국가들의 비중을 높이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모색 중이다. 미국이 핵심광물 시장의 주요 구매자들과 결성한 ‘광물안보파트너십(MSP)’1)이 대표적이다. 자원부국들에게 대규모 개발 및 고부가가치화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일정 수준의 반대급부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관련 자원의 채굴 및 가공, 자금 조달 과정에서 선진국 수준의 ESG 조건을 의무화해 참여 문턱을 높이는 방식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즉, 중국 기업들의 대중남미 자원 투자나 원자재 가공 프로젝트 진출 부담은 높이고, 회원국 기업들의 진출 환경은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 문턱을 넘기 위해서는 중국 정부와 기업들의 대대적인 변화와 지배구조 개혁이 필요한 만큼 선진국들 입장에서는 유효한 견제 전략이 될 수 있다. 다만, 요구 조건이 지나치게 높게 설정될 경우 자칫 우리 기업들에게도 진입 장벽이 될 수 있는 만큼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우리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1) Minerals Security Partnership: 미국, 한국, 캐나다, 일본, 호주,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독일, 핀란드, 영국, 이탈리아 및 EU 등이 회원국으로 참여

한·중남미 협력 확대를 위한 과제

공급망 대응을 위한 한-중남미 협력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각국 정부의 제도 개선을 설득하는 외교적 노력과 협력도 필요하다. 광물자원 중요성이 커지면서 어느 때보다 해외기업 유치 여건이 좋아진 중남미 국가들에게 ‘이번 기회를 각국 산업 기반 업그레이드 기회로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우리 기업들의 중남미 관련 우려 요소들, 즉 제조업 경쟁력과 인적자원 부족, 치안이나 물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 확충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설명해 실질적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야 하는 큰 과제가 남아 있다.

이와 더불어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몇몇 중남미 국가들이 고려 중인 ‘자원 국유화’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자원을 국유화하더라도 운영권만 정상적으로 투명하게 관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업들이 걱정하는 부분은 자칫하면 이런 움직임이 ‘자원 무기화’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가능성이다. 따라서 자원 국유화를 추진하더라도 FTA 파트너 등 경제적으로 긴밀한(=신뢰할만한) 국가에 대해서는 수출 통제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약속 등을 제안해볼 만하다.

우리 기업들 입장에서도 결단이 필요하다.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면 단기적으로는 생산비 증가, 판매가격 상승 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정학 리스크 등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인들이 상수로 자리 잡아가는 변화 속에서 주요 산업의 공급망 복원력(resilience)을 확충한다는 것은 보험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미래의 더 큰 피해와 손실을 방지할 뿐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출발점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투자 매력도를 한층 더 높여줄 수 있어서다. 다만, 공급망 재편은 ‘경제안보’ 역량 강화에 필요한 여러 대응 수단 중 하나라는 점에서, 주요 선진국들이 공급망 재편을 마무리한 후 취할 다음 단계를 미리 고민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노력이 함께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맺음말

중남미 자원 보유 국가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줄곧 자국 원자재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희망해왔다. 그럼에도 이런 꿈이 이뤄지지 못했던 이유는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아시아 등 다른 경쟁국 대비 충분한 비교우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바탕에는 열악한 인적자원 육성 시스템과 물류, 전기, 통신 등의 인프라 문제가 자리해 있다. 다행히 가격 경쟁보다 공급망 안정이 중시되는 경제안보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남미 국가들은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적자원과 인프라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USMCA 등의 노동 관련 조항에서 알 수 있듯이, 앞으로는 주요 선진국들이 자국 시장 진입을 위한 허용/우대 조건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임금과 노동 환경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높은 임금을 지불해도 충분할 만큼의 생산성 갖춘 인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공교육 및 산업 현장의 기술 교육 기반 확충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다행히 이 부분은 우리 사회와 기업들이 상당한 비교우위를 가진 만큼 중남미와의 협력을 통한 이익 공유 전망이 밝다.

또한, 핵심광물 분야에서 중국 견제 수단으로 사용될 ESG 요건 강화와 관련해서도 한국과의 협력을 확대할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광물 개발, 즉 채굴과 가공, 고부가가치 상품화 과정에서 충족시켜야 할 ESG 기준이 유럽 시장 수준으로 높게 설정되면 친환경 설비 및 탄소배출 모니터링 시스템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에너지, 통신, 물류 등 인프라 전반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는 뜻이고, 이 분야에 경쟁력이 있는 한국과의 협력을 확대할 좋은 기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