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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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의 인플레이션은 작년 중순 정점을 찍은 이후, 올봄 식량과 에너지 가격의 안정세에 따라 전반적으로 둔화되고 있다. 최근 노동 시장도 빠르게 회복세를 보이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생산과 투자 정체로 어려움을 겪었던 중남미 각국도 이제는 성장 동력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치적으로는 러-우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중국·러시아 간 대결 구도가 본격화되면서 전 세계가 지정학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올해도 미-중 갈등은 더 심화되고 있으며, 신냉전 같은 분위기 속에서 글로벌 공급망의 분열이 전 세계에 적지 않은 경제 충격을 주고 있다. 미주 대륙에서도 향후 급변하는 대외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지정학적 리스크가 실존 위협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중남미에서는 코로나19에 대한 전반적인 방역 부실과 경기 침체, 그리고 이로 인한 양극화 심화로 역내 주요국 정부가 모두 좌파 정부로 교체되는 역사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다. 특히, 작년 말 브라질 대선에서 좌파의 대부인 룰라(Luiz Inácio Lula da Silva)가 최종 승리하면서 올 연초부터 중남미에는 브라질을 중심으로 단일 화폐 추진과 남미국가연합(UNASUR)의 재건 움직임 등 심상치 않은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향후 중남미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 주목하면서 현재 중남미 주요국들이 당면하고 있는 주요 이슈들을 점검해보고 향후 변화를 예측해 보도록 하자.
먼저 대통령의 임기 6년 중 5년 차까지 매우 성공적으로 보내고 있는 멕시코의 AMLO(Andrés Manuel López Obrador의 약칭) 대통령은 여전히 60% 전후의 높은 지지율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차기 대선은 AMLO의 후광을 얻은 연방 정부 각료들과 여당(MORENA)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는 야당(PRI, PAN, PRD) 예비 후보들에 비해 유리한 형국이다. 여당의 유력한 후보로는 셰인바움(Claudia Sheinbaum Pardo) 멕시코시티 시장, 에브라르드(Marcelo Luis Ebrard Casaubón) 전 외무장관, 로페스(Adán Augusto López Hernández) 내무장관, 몬레알(Ricardo Monreal Ávila) 상원 원내대표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내년 6월 본 선거를 앞두고 올 12월 예정된 경선을 치르기 위해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선출 방법이 정해지도록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까지는 AMLO와 같은 정치 경로를 밟아 온 셰인바움이 가장 유력해 보이며, 최종 후보로 누가 선출되든지 간에 그는 역대 가장 강력한 멕시코 좌파 진영의 후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경선 과정에서 탈락한 후보들이 불공정을 외치며 이탈하게 된다면 AMLO라는 구심점이 없어질 MORENA도 분열되기 시작할 것이다.
한편, 미-중 갈등 심화와 글로벌 공급망의 분열은 멕시코 경제에 오히려 활력을 주고 있다. 작년 미국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 정부가 첨단 기술 산업의 해외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의 공급망 회복을 위해 반도체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발효하면서, GM, 포드, BMW, 테슬라 등 주요 글로벌 자동차사들이 잇따라 멕시코에 전기차 생산설비 투자를 발표하고 나섰다. USMCA 체제 안에서도 미국과 크게 갈등하던 친환경·신재생 에너지 산업과는 달리, 멕시코 정부도 자동차 산업의 미래가 달린 전기차 투자와 관련해서는 해외 자본의 유입이 싫지 않은 내색이다. 현재 강(強) 달러로 인해 물가상승 압박이 여전하지만, 연말이 지나면 차츰 완화될 것으로 보여 멕시코의 마약, 살인, 불법 이민 등 치안 문제가 발목을 잡지 않는다면 AMLO는 남은 임기를 평온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브라질의 룰라는 극우 성향의 전직 대통령이던 보우소나루(Jair Messias Bolsonaro)를 1.8%라는 아주 근소한 차로 누르고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층 간 갈등이 극단에 이른 브라질 사회를 조속히 통합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인 서민층을 부양하면서도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재정 적자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신뢰를 보여줘야 하는 난제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선 관록의 대통령답게 이미 보여준 바 있는 유연한 리더십으로 취임 초부터 중도 및 중도우파 정당들과 끊임없는 협상을 통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연립 정부와 여당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 자신의 대표적 복지 정책인 ‘보우사 파밀리아’1) 재개 이후 올해 4월 발표한 재정준칙 또한 중앙은행과 시장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합하여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있다. 현재 저(低)성장 우려로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정부와 중앙은행 간 갈등만 잘 마무리된다면, 브라질은 어렵게 잡은 인플레이션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겠지만 다른 두 마리 토끼(재정 억제와 성장)를 잡는 데 성공할 수 있어 보인다.
1) 2003년부터 룰라 정부가 시행한 저소득층 대상의 사회복지 프로그램, 지원금 수령 조건으로 자녀 취학과 예방 접종을 의무화
아르헨티나는 올 10월에 대선이 예정되어 있으며, 현직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Ángel Fernández) 대통령이 불출마 의사를 밝힘에 따라 여당 유력 후보가 없는 상태로 예비선거가 치러지는 8.13까지 여러 예측이 난무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 부통령도 재출마가 불확실함에 따라 그녀의 영향력으로 경제 정책을 사실상 총괄하고 있는 마사(Sergio Tomás Massa) 경제 장관이 현재 가장 유력한 선두 주자로 꼽힌다. 다른 잠재적인 후보로는 시올리(Daniel Scioli) 주브라질 대사가 있으며, 키르치네르주의(Kirchnerism; 페론주의 내 강성 좌파) 분파에 속하는 페드로(Eduardo Wado de Pedro) 내무장관과 키실로프(Axel Kicillof)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야당의 강력한 도전자로는 불리치(Patricia Bullrich) 전 안보장관, 라레타(Horacio Rodríguez Larreta)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 등이 떠오르고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직 인플레이션의 공포가 끝나지 않고 있으며, 비교적 온건 좌파 성향인 현 대통령은 IMF와 오랜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들이 제시하는 지침을 어느 정도 수용할 전망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을 수 있는 노동, 연금, 세제 개혁 등과 같은 구조적 변화보다는 외환보유고를 늘리고 재정 적자는 줄이고 인플레이션은 억제하는 조치에 초점을 맞춰가며 최대한 천천히 이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선 결과, 집권당 내 키르치네르주의 분파가 승리하게 된다면 IMF와 이미 합의했다 하더라도 그 이행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야당이 승리한다면 누가 되든지 간에 해외 투자 자금의 유입을 위해 일정 부분 자본 통제를 해제하고 시장을 개방하려 하겠지만, 이미 마크리 정부의 정책 실패가 쓴 교훈으로 아직 남아있는 국민 여론을 감안하면 실행은 쉽지 않을 것이다.
칠레는 작년 9월 신헌법 최종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면서 금년 5월 제헌 의회를 다시 구성하였고, 전문가 그룹의 도움을 받아 헌법을 다시 작성하고 있다. 이번 헌법에서는 국가의 사회적 역할과 개입이 더 강화될 것이 확실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칠레가 지금까지 국제사회에 보여 준 신뢰와 시장 개방성을 고려하면, 환경적·사회적 감시는 이전보다는 강화되겠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개인의 재산권 행사나 민간 부문의 투자를 크게 제한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보리치(Gabriel Boric Font) 대통령은 그의 야심찬 대선 공약 중 하나였던 연금개혁과 이를 연계한 세제 개편이 야당이 주도하는 의회에 의해 좌초될 위기에 처하면서 세수를 GDP의 3.6%2) 더 증대하려던 계획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보건, 교육 분야 지출을 더 늘리기 위한 세수 확보를 위해 야당과 상대적으로 합의가 쉬운 광업세를 인상하는 손쉬운 해결책을 찾으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높은 인플레이션과 경기 둔화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헌법 개정, 연금개혁 등 정부의 급진적인 개혁은 산티아고 등과 같은 대도시에서 또다시 시위를 촉발할 수 있다. 그러나 토지 반환 이슈로 정부와 갈등 중인 남부 라 아라우까니아(La Araucanía) 지역 마푸체(Mapuche) 원주민들의 시위를 제외하면 2019년과 같은 과격하고 전국적인 소요사태 가능성은 현재로는 낮아 보인다.
2) 앞서 3월 정부 측이 발표한 최신 OECD 자료 기준, 칠레 21%, 중남미 평균 28%, OECD 평균은 34%
페루에서는 작년 말 무소속3) 카스티요(José Pedro Castillo Terrones) 전 대통령이 의회에서 탄핵되었다. 궐석을 승계한 볼루아르떼(Dina Ercilia Boluarte Zegarra) 대통령은 중도 및 우파 정당의 지지를 받고는 있으나 무소속인 상황에서 권력 유지가 불안정하다. 이에 따라 2026년 예정인 총선을 2년 앞당겨 2024년 실시하려 하나, 대통령을 지지하는 정당 간에도 찬반이 엇갈리면서 여론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도 올해 2월 이후 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는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도심과 공항, 주요 도로 등에서는 기물 파손과 약탈을 포함한 폭력적인 행동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반해, 정부와 의회 간 관계는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어 정부의 행정 공백은 당분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쳐 올해 페루 경제는 기후 요인까지 더해 GDP 성장률이 작년 2.7%에서 하향된 1.5% 성장이 예상된다.
3) 좌파 정당인 자유페루 소속이었으나, 중도 경제 정책 시행으로 출당 조치
90년대 미국 주도로 만든 워싱턴 컨센서스4)의 최초 적용 대상은 당시 외채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중남미 국가들이었다. 이 처방으로 중남미 국가들은 외국인 투자 유입과 1차 산품 수출이 증가하면서 외채 위기에서는 벗어났으나, 선진국 금융자본의 쉬운 먹잇감이 되면서 2000년대 중남미 좌파 집권의 도미노가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1차 핑크 타이드5)). 그리고 지난 30여 년간 여러 논란 속에서도 글로벌 경제를 움직여왔던 신자유주의가 중남미에서 2차 핑크 타이드로 먼저 종식을 고(告)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4) 1990년 미국이 아시아, 남미 등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위기 해법으로 제시한 세제 개혁, 무역∙투자 자유화, 규제 완화 등을 담은 10가지 신자유주의적 정책 제안
5) 2000년대 중남미에서 선거를 통해 중도 또는 온건 좌파들이 잇따라 집권한 현상. 공산주의 유행을 뜻하는 붉은 물결(Red Tide)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
최근 중남미에서 집권한 신좌파 정부는 학생·농민 운동, 게릴라 출신들이 중심이며, 예전과 달리 과격하지는 않더라도 급진적이다. 이들은 빈곤과 불평등 해소를 경제 성장보다 우선하여 국가 자원이나 토지 활용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재원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또 일부에서는 기존 민간이 운영하는 에너지, 광물 사업에 대한 국영화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정부의 과도한 개입으로 시장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원자재 슈퍼 사이클로 호황을 누렸던 2000년대와 상황이 크게 다르다. 세계 곳곳에서는 지정학적 갈등과 공급망 분열로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증가하고 있으며, 서방 선진국과 주요국들은 핵심 광물, 반도체, 배터리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의 주도권을 두고 저마다 동맹을 맺고 이합집산을 통해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에 더해 중남미 국가들은 현재 재정 상태가 건전하지 못하다. 작년 기준 중남미 전체 재정 적자 규모가 GDP 대비 4.9%6)에 달하고 있으며, 경상 수지가 구조적으로 개선될 수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크게 늘어난 재정 지출로 인해 정부 부채 규모(작년 기준 GDP 대비 69.4%)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칫 중남미의 시장 친화적이지 않은 정책들이 과거 냉전 시기처럼 잊혀진 대륙으로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대목이다.
6) 베네수엘라 제외, 국내외 여러 기관 자료 종합 및 저자 정리
물론 멕시코, 브라질과 같은 국가는 과거 비동맹 제3세계에 머물던 수준에서 벗어났다. 적어도 이 두 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시장에 보여주고 있으며, 역내 제조업 라이벌이자 쌍두마차로서 중남미 경제를 이끌고 있다. 국제정치적으로도 멕시코 AMLO 대통령은 중남미 리튬 주요 생산국들과 동맹을 통해 관련 산업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하고 있다. 특히 국제사회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룰라 대통령의 경우, 남미 대륙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등 기존 BRICS 국가들과도 협력을 강화하고 회원국 확대를 통해 정치 블록화를 시도하는 등 서방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가치동맹에 일방적으로 편입되지 않기 위해 다극화를 추구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후폭풍을 힘겹게 견뎌온 중남미 국가들이 미-중 전략 경쟁 심화로 신냉전에 버금가는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과거 암흑기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친환경 탄소 중립 시대 성장 산업의 당당한 파트너로 도약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