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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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중남미에서 빠른 속도로 영향력을 확장해왔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연구자는 물론이고 언론 역시 중남미에서 전개되어 온 중국의 세력 확장에 주목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부쩍 가까워지기 시작한 중국과 중남미는 경제,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다져왔다.
먼저,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중남미의 상호 무역 의존성이 높아졌다. 이때부터 중국이 역내 자원 부국으로부터 석유, 광물, 농산품을 수입해 오고 대부분의 국가에 공산품을 수출하는 전형적인 무역구조가 굳어졌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국책은행인 중국수출입은행과 중국개발은행이 중남미 국가의 정부와 국영기업에 큰 규모의 자금도 빌려주기 시작했다. 중국 국영기업이나 민간기업의 대중남미 투자도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국과 중남미의 협력관계는 더욱 두터워졌다. 중국은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중남미 국가에 공세적인 의료용품 지원을 시행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중남미에서 연이어 좌파 정부가 출범하며 중국이 중남미 국가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정학적 토양이 다져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중남미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중국의 보폭은 더욱 넓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이 중남미에서 적극성을 보여온 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경제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석유, 광물, 농산품 등의 자원 확보와 자국의 수출시장 확대를 위해 중남미는 핵심적인 지역으로 꼽힌다. 중국의 대중남미 협력 활동은 지정학적 목표 역시 투영하고 있다. 미국의 ‘뒷마당’이라 불리는 중남미에서 미국을 견제하고 대만을 고립시켜 새로운 역내 질서를 창안하고자 하는 구상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남미 국가의 무역에서 중국 의존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중남미 국가와 중국의 무역 관계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2020년 중남미 18개국의 총수입 및 총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20%와 13%에 달하게 되었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페루로 이루어진 중남미 경제 규모 상위 6개국은 같은 연도 기준 총수입 및 총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21.4%와 14.9%를 기록했다.
미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절대적인 멕시코를 빼면 대중국 무역 의존도는 더욱 올라간다. 2020년 기준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페루의 중국에 대한 수입 의존도는 23.8%, 수출 의존도는 28.3%로 나타났다. 2002년 동 5개국의 중국에 대한 수입 의존도와 수출 의존도는 각각 4.3%와 4.4%에 불과했다. 반면, 5개국의 미국에 대한 수입 의존도는 2002년 21.7%에서 2022년 10.2%로, 수출 의존도는 2002년 23.8%에서 2020년 12.4%로 사실상 반으로 줄었다(그림 1).
중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일부 중남미 국가에 막대한 자금도 빌려주기 시작했다. 국책은행인 중국수출입은행과 중국개발은행이 2007년부터 2022년까지 중남미 10개국의 정부와 산하 국영기업에 연평균 94억 달러가량의 차관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2015년을 기점으로 중국의 대중남미 차관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으며,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과 2021년에는 단 한 건의 차관도 집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림 2).
이것이 코로나19의 여파인지 중국 공산당의 대중남미 협력 전략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들어 중국개발은행이 브라질 중앙은행에 대한 5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집행했지만, 중국에서 유동성이 줄어들고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있는 가운데 대중남미 차관이 예전의 규모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내정 불간섭 원칙에 따라 정책 조건이 없는 중국의 차관은 서방 국가 주도의 다자금융기구가 제공하는 차관에 접근이 어려웠던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에서 그간 큰 환영을 받았다. 중국이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외세력으로 급부상하는데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되어 온 차관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관찰해야 한다.
중국은 정부 소유의 공기업과 민간기업이 중남미 현지 기업을 인수하거나 자국 기업과 합병하는 방식의 브라운필드 투자를 중심으로 중남미에서 투자 활동을 활발히 진행해 왔다. 2000~22년간 중남미 16개국에 대한 중국의 연평균 브라운필드 투자액은 62억 달러였다. 최근에는 중국 기업이 직접 현지 법인을 설립해 투자하는 그린필드 투자도 크게 늘고 있다. 같은 기간 중남미 16개국에 대한 중국의 연평균 그린필드 투자액은 24억 달러로 나타났다. 투자 대상국별로 나누어 보면 브라질, 페루,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등 경제 규모가 크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국가에 중국의 투자가 집중됐다(그림 3).
이번에는 중국의 대중남미 투자를 부문별로 나누어 보겠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원자재 부문에 대한 인수합병 방식의 투자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 10년 사이에는 제조업과 서비스 부문이나 내수시장 공략을 위한 투자가 나타나는 추세도 관찰된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자연스레 중국의 투자가 창출하는 고용 역시 늘어나고 있다(그림 4).
올 초 취임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 가장 눈에 띈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고립적인 외교정책과 노골적인 반중 언사로 악화한 양자 관계가 원상복구 될 것임을 시사한 행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룰라 대통령은 이번 중국 방문을 통해 룰라 정부의 외교정책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최우선 순위가 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3시간여 동안 이어진 정상회담에서는 폭넓은 의제가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는데, 농업, 인프라, ICT, 에너지, 항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자 협정이 체결됐다.
정상회담 의제는 양자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두 정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양국의 견해를 교환했는데, 중국과 브라질 등 개발도상국이 전쟁 당사국 간 협상을 중재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질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견해를 보이지만, 서방 국가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는 등 모호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브라질 정상회담은 앞서 2월 실시된 바 있는 미국-브라질 정상회담과 상당한 대조를 보였다. 바이든 대통령과 룰라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아마존 열대우림 보존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했지만, 기대되었던 아마존 기금에 대한 미국의 재정적 기여와 같은 양국 간 실질적 협력 증진을 위한 조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상회담에서 대거 쏟아진 합의 내용과 별도로 중국과 브라질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도 여럿 마련됐다. 룰라 대통령이 화웨이의 본사를 방문하며 브라질의 5G 네트워크 구축 사업에서 화웨이를 배제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브라질 내 중국 기업의 반도체 공장 건설 역시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정상회담 즈음 양국은 향후 양자 간 무역에서 미국 달러 대신 중국 위안화나 브라질 헤알화를 결제 통화로 사용하겠다는 약속도 내놨다. 양자 무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겠다는 시도로 읽힌다.
중국과 브라질은 미국 주도의 금융 협력체제에도 함께 반기를 들었다. 2014년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루어진 브릭스(BRICS) 국가에 의해 설립된 신개발은행(NDB)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개발도상국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이 출자한 다자금융기구를 통해 까다로운 대출 조건을 요구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룰라는 미국 주도의 개발금융기관의 ‘횡포’와 국제무역에서 미국 달러의 지나친 지배력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최근 5년 사이 중남미에서 연이어 좌파 정부가 출범하며 중국의 대중남미 협력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남미 국가 입장에서는 정부의 성향과 관계없이 중국을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좌파 성향의 중남미 정부만 중국과 협력을 도모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남미에서 몇 안 되는 우파 정부 집권 국가인 우루과이는 메르코수르(MERCOSUR) 회원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2021년부터 중국과의 단독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협상을 밀어붙이고 있다. 엘살바도르 역시 FTA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경제협력을 위해 중국에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에서 탈피하여 다극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세계 질서 속에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서반구에서의 패권 경쟁 역시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역내 리더십 공백을 틈타 중국이 2000년대 초반부터 빠르게 중남미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미국의 역내 영향력 감소가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여러 중남미 국가는 상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새로운 주요 역외세력인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서반구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지난 20여 년간 중남미에서 남남협력을 통한 개발도상국 간 연대 강화라는 명목으로 무역, 개발금융, 투자, 양자·다자 간 외교 협력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국의 역내 영향력을 높여왔다. 이러한 결과로 중국은 중남미 대부분 국가의 유력한 경제·외교 협력 파트너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제 중국이 서반구에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할 만큼 중남미에서 높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더 이상 반박하기 어렵다. 중남미 국가가 미·중 경쟁과 역내 지정학적 질서 재편 과정에서 어떻게 중국을 전략적 지렛대로 삼을 것인지, 중국은 앞으로 어떤 경제적·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중남미에 접근할지, 그리고 미국은 중국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할지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