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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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일 새벽 0시 55분 칠레 중부지역에 불어닥친 124km/h의 강풍은 중부지역 기상관측 역사상 최고 풍속을 기록하였다. 이전 최고 풍속 기록은 1968년에 관측된 76km/h였다.
이번 강풍으로 인해 수도권 지역에서 나무 2,600여 그루가 쓰러졌고, 이로 인해 전신주 800여 개가 함께 쓰러지며 정전, 교통마비, 주택 파손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칠레 국가재난방지대응청(Servicio Nacional de Prevención y Respuesta ante Desastres, SENAPRED)은 이번 강풍으로 인하여 4명이 사망하고, 1,700채의 주택이 손상되었으며, 정전 피해 가구가 111만 7천 호(수도권 71만 호)에 이른 것으로 집계하여 발표하였다.
강풍으로 인한 전신주 파손보다, 더딘 전력 복구 속도가 시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강풍 피해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전력 복구가 완료되지 않아 수도권의 10만 가구 이상에서 정전이 지속되었다. 이에 보리치(Boric) 대통령은 8.7(수) 성명을 통해 일주일 이상 지속되고 있는 대규모 정전사태에 대해 배전 업체들에게 신속한 복구와 선제적 보상 계획 마련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특히 에너지부에 수도권 배전업체 Enel社의 ‘심각한 계약 미이행 및 비효율성’을 사유로 하여 운영권 허가 취소를 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칠레는 피노체트(Pinochet) 군사정권 시절 주요 산업과 기초 인프라 분야에 대하여 자유화, 민영화 정책을 단행하였다. 전력 분야에서도 세계 최초로 전력산업에 자유시장경쟁 원리를 도입하였다. 1982년 제정된 「전력산업민영화법령」에 따라, 다수의 민간 업체들이 설립되었고 1989년까지 대부분의 국영 전력회사가 민영화되었다.
칠레의 배전사업자는 기한이 특정되지 않은 배타적인 사업 허가(Concesión)를 얻어 운영하고 있다. 배전사업 허가를 득하면, 허가 지역 전력 인프라를 소유하고, 운영할 권리를 갖고 고객에게 전력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된다. 즉, 배전사업자는 공급 의무와 함께 적절한 서비스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의무 불이행 시 정부가 사업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현재 칠레 내 주요 배전사업자로는 금번 강풍으로 인한 피해 전력망 복구가 지체되어 허가 취소가 검토되고 있는 Enel社(이탈리아) 외에, 4개 업체(▴Compañía General de Electricidad Industrial, CGE-중국, ▴Chilquinta-중국, ▴Grupo SAESA-캐나다, ▴Empresa Eléctrica Puente Alto, EEPA-칠레)를 들 수 있다. 이들 5개 사는 고객 수 기준 칠레 전체 배전시장의 97%를 점유하고 있다.* 나머지 3%는 지리적 특성상 국가 전력 계통 연결이 어려운 지역에서 마이크로그리드를 통해 전력이 공급되고 있다. 최근 주목할 만한 배전시장의 변화는 중국 국가전망공사(State Grid Corporation of China, SGCC)의 칠레 배전기업 인수이다. 중국 국가전망공사는 CGE社와 Chilquinta社를 2021년과 2020년에 각각 인수하여, 칠레 배전시장의 55%를 점유하고 있다.
* 각 기업별 고객 수(점유율): ▴CGE社: 328만(43.5%), ▴Chilquinta社: 81만7천(10.8%), ▴Enel社: 212만(28.2%), ▴G. SAESA社: 102만(13.5%), ▴EEPA社: 6만3천(0.8%)
Enel社에 대한 허가 취소의 법적 근거는 「전기 서비스 일반법(Ley General de Servicios Eléctricos)」 제41조이다. 동 법에서는 전력 서비스 품질이 법령과 양허 계약상 규정된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와 에너지부 산하의 전기연료감독청(Superintendencia de Electricidad y Combustibles, SEC)에서 요구하는 전력 서비스 개선이 기한 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대통령이 대통령령을 통해 공공 배전 서비스 양허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은 임시적으로 서비스 운영 및 관리를 담당할 업체를 결정하도록 SEC에 명령할 수 있으며, 동 법 제43조에서는 대통령이 공공 배전 서비스 양허 취소를 공포한 경우, 해당 자산과 서비스에 대한 입찰을 명령하고, 1년 내에 입찰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8월 16일, 디에고 파르도우(Diego Pardow) 에너지부 장관은 이미 SEC를 통해 허가 취소를 위한 조사 절차가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고 언급하였고, 조사를 통해서 기술보고서를 작성하여 대통령께 보고하면, 대통령이 보고서 검토 후 운영 허가 취소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고 한다. 동 보고서는 배전사의 의무 불이행 여부에 대한 심층 조사 결과가 포함되며, 작성에는 6개월에서 1년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칠레 정부 측은 금번 강풍을 동반한 악천후가 기상청 등을 통해 사전에 충분히 예고되었다고 보며, 전신주 등 배전 인프라 주변의 나무 제거와 같은 배전사 측의 예방 조치가 미흡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정부 측이 제시한 복구 시한 미준수 등을 주요 운영 허가 취소 사유로 제시하고 있다. 지난 5월에도 폭우 및 강풍으로 인해 수도권 지역에 정전사태가 발생하였고, SEC는 Enel社에 배전 인프라 관리 미비, 복구 지연으로 인한 소비자 불편을 사유로 약 40억 페소(400만 달러 상당)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인프라 관리 미비와 전력 복구 대응 지연이 시정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이에 기업 측은 강풍 예보가 있기는 했으나, 역대 최대 강풍이 발생한 1968년 수준으로 판단하고 대비했으며, 이 정도의 강풍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규정상 50여 개의 전력복구팀을 유지하면 되지만, 이번 강풍 피해에 대하여 300여 개의 복구팀(외주 용역 포함)을 꾸려 긴급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 규모가 커서 신속한 복구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또한, 인프라 관리 미비 부분에 대해서는 전신주 주변 2m 내외의 공간을 비우도록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가로수에 대해서는 구청허가, 개인주택에 있는 것은 주인의 허가를 얻어야 하므로 정지작업에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전신주 주변 2m’ 규정도 이번에 쓰러진 나무들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충분한 거리라고 볼 수 없고, 나무 기둥을 제거하는 것에는 환경단체의 큰 반발이 있어, 민간기업 차원에서 신속하게 조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기업 측은 이번 강풍으로 인한 배전 인프라 손상과 복구 지연이 기후변화 자연재해에 의한 불가항력(Fuerza mayor)에 의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대응하고 있다.
전력시장 전문가들은 단기간 내 배전 인프라 운영사 대체는 쉽지 않고, 허가 취소 사유 및 책임 소재 증명과 장기간 법적 절차가 소요되며, 운영사 교체 시에도 신규 기업이 운영권과 함께 이전 배전기업의 자산을 인수해야 하는데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고려했을 때 운영권 허가 취소 및 배전사 교체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번 강풍으로 인한 전력 인프라 피해와 복구 지연에 따른 배전사 운영 허가 취소 논의는 다양한 논쟁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배전 인프라 관리는 공유지와 사유지에 있는 나무나 기타 장애물 제거 등 다양한 주체 간 협조를 얻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민간 배전사에게 전적으로 맡길 시 효과적인 관리와 신속한 재해 대응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둘째,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에 의한 인프라 피해에 대해,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인프라라고 해도 국가 차원의 신속 복구 대응체계에 포함시켜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목소리가 있다. 이번 강풍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칠레의 기후가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금번 강풍이 지난달부터 진행된 남극의 극소용돌이 약화가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는 과학자의 의견도 언론을 통해 전해지기도 하였다. 좀 더 심도있는 원인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지구온난화 등으로 기후변화로 인해 기후가 극단적으로 변화하면서, 앞으로 이전보다 자연재해(홍수, 가뭄, 강풍 등) 발생 빈도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으며, 이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국가 차원의 신속 재난대응체계 수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공공성을 가진 인프라가 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때 복구를 민간 운영사에만 맡기는 것보다는, 국가기관이 함께 총력 대응하여, 인프라를 신속히 복구하고, 그 이후에 천재지변인지 인위적 재해인지 책임소재를 따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번 강풍이 불러온 민간 배전 업체 운영 허가 취소 절차 진행과 관련하여, 공공성을 지니는 기초 인프라 분야에서 민영화 체제로만은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렵고, 재난 시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번 SEC의 허가 취소 관련 기술조사는 민간기업이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 서비스 제공을 위해 의무를 다했는지를 파악하는데 의미가 있으며, 이번에 문제가 된 기업뿐 아니라 다른 전력사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는 목소리도 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재해 발생 가능성에 대비하여, 정부에서는 관련 기업들이 안정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력복구팀 추가 확보, 전력 기자재 재고 비축 확대 등 좀 더 상향된 기준을 적용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발전 분야에 진출해 있는 우리 에너지 기업들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전력 분야 논의 동향을 모니터링하여 우리 기업들이 위기에 대응하며 새로운 기회를 포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